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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과 전통음악

#1. 지우지 못한 부채의식 : 이야기의 시작

by ontheRoad 2022. 1. 20.

1. 지우지 못한 부채의식

나에겐 지우지 못한 ‘부채의식’이 가슴 깊이 새겨져 있다. 2014년 세월호 참사가 바로 그것이다. 당시 모교인 국립예술학교 교사로 재직 중이던 나에게는, 배 안에 있던 300여 명의 학생들이 학교에서 가르치던 300여 명의 전교생과 다름없게 느껴졌다. 학교는 견고한 한 척의 배였고, 학생들은 미래를 담보로 입시 지옥에 갇혀 헤어 나오지 못한 채 부유하는 모습과 같았다. 그리고 그렇게, 나의 잘못이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지켜내지 못했다는 죄책감에 한 달을 보냈던 기억이다. 그리고 또 하나, 세월호 참사로 인해, 공연이 모두 취소된 예술인들의 말 못 할 울음들은, 당시 직장 생활을 하며 비껴간 안전한 현실 가운데 끝없는 부채의식을 안겨주었다.

 

그때가 시작이었다. ‘국가는, 정부는 왜 아무 죄 없는 학생들을 끝내 지켜내지 못했는가’에 대한 끝없는 질문에 사로잡혀 있었다. 마침 학교 현장학습 장소가 역사박물관이었고, 그 건물 옥상에서는 청와대가 한눈에 보였다. 해맑게 웃는 아이들의 어깨너머로 보이는 파란 지붕은, 교사로서 그리고 예술가로서 새롭게 품게 된 질문과 아픔을 풀어내고 싶다는 욕망을 자극하기에 충분했다. 그렇게 한 해를 꼬박 고민한 끝에, 재계약서에 사인을 하지 않고 교편을 내려놓는 선택을 하기에 이르렀다. 그리고 무엇이 문제인지 알고 싶어 동분서주한 나날이 한 해 한 해 이어지면서, 생계라는 뼈아픈 현실을 마주해야 했으며, 때때로 학교를 나온 선택을 후회하기도 했다. 돌이켜보면 그만큼 나에게 교사란 직업은 천성으로 여길 만큼 잘 맞았던 것 같고, 또 그만큼 질문에 대한 간절함이 진심이었던 것 같다.

 

다시 야생으로 나와 프리랜서 예술가로서의 삶을 시작했다. 하지만 연주활동만으로 생계를 유지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할 수 있는 일이라면 기회가 닿는 대로 열심히 했다. 문화센터에서 단소를 가르치는 일부터 시작해 국악학원,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와 대안학교에서도 수업을 했다. 경력과 시간이 쌓이자 자연스럽게 대학교와 대학원에서도 강의를 하게 되었다. 글을 쓰는 일도 꾸준히 이어왔다. 전문적인 작가는 아니었지만, 국악분야에서 글을 쓰는 사람이 많이 없었던 덕분에 방송작가와 축제 작가, 그리고 칼럼니스트로 활동할 기회가 찾아왔다. 또 연주활동의 기회를 잡아야 하는 현실 앞에서 기획자로서의 역할 또한 잘 소화해야만 하는 일 중 하나였다. 이렇게 ‘n잡러’로서의 삶을 살며 예술인의 정체성을 지켜나가긴 했지만, 예술가로서의 ‘충분한’ 삶을 이루기엔 턱없이 부족했다. 무엇이 문제일까? 매일 밤 잠들기 전, 아쉬운 마음을 한가득 안고 스스로 물어보는 날들이 쌓여만 갔다.


2. 예술정책의 필요를 알게 되다

변곡점이 찾아왔다. 코로나19로 온 세상이 멈춰버린 것이다. 50년 넘게 이어온 세계적인 축제는 물론이고, 시골 마을의 작은 축제까지, 세상 모든 예술 또한 멈췄다. 그리고 이와 같은 위기 앞에 각 나라의 예술정책의 민낯이 드러났다. 독일을 비롯한 문화 선진국들은 당연하다는 듯, 예술을, 예술인을 위한 제도와 정책을 가장 먼저 발표했고, 이에 비해 턱없이 빈약한 우리의 예술 정책은 우리 사회에서 예술에 대한, 예술인에 대한 우선순위가 얼마나 낮은지 명확히 깨닫게 해 주었다.. 자연스럽게 ‘코시국’의 생존은 ‘예술정책’에 달렸다는 생각이 들었다. ‘코로나 사태’는 예술만 생각해오던 나의 삶을 ‘예술정책’에 한걸음 다가가도록 한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정책 전문가가 아닌 나에게 예술정책은 미지의 영역에 대한 두려움을 갖게 하기에 충분했다. 처음에는 그저 ‘코로나 예술인 지원’이 시행될 때마다, 관련 기관에 문의하고 알아가는 정도였지만, 알면 알수록 정책이 예술가의 삶에 얼마나 직접적인 연관이 있는지 충분히 느낄 수 있었다. 또한 없는 정책을 새롭게 세워가는 일도 무척 어렵지만, 이미 세운 정책을 현재성에 맞게 수정하고 보완하는 일은 그간 쌓인 이해관계자의 첨예한 대립 또는 선입견 등으로 인해 훨씬 어렵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크고 작은 정책이 주는 긍정적인 변화는 그 어떤 것보다 확실했다. ‘코로나 예술인 긴급 재난지원’이라는 이름으로 예술인을 대상으로 한 생활비 지원이 이뤄지고, 저금리의 예술인 융자도 시행됐다. 아쉬운 부분이 많긴 하지만, 이러한 사회적 분위기를 타고 2020년에는 프리랜서 예술인도 실업급여와 출산 전후 급여를 받을 수 있는 ‘예술이 고용보험법’이 제정되었으며 얼마 전 2021년에는 ‘예술인권리보장법’이 국회 본회의를 통과해 드디어 예술인의 권리가 법률로 보장되었다. 2년간의 직간접적인 예술정책에 대한 경험은 이후로도 예술인과 그들을 둘러싼 생태계를 이해해가는데 큰 도움이 되었다.

 

하지만 예술정책이 곧 예술인의 현실적인 모든 문제를 해결하는 ‘요술방망이’는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술인과 예술을 향유하는 모든 이들이 관심을 갖고 함께 고민해야 하는 이유는 그만큼 우리 사회에서 예술인의 기본적인 권리가 보장받지 못하고 있고, 예술에 대한 건강한 시민의식 또한 자리잡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것은 예술인이기 때문에 특별히 대우해야 한다 한다거나, 반대로 예술인이 불쌍해서 복지혜택을 누려야 하는 존재여서가 결코 아니다. 우리 사회는 문화와 예술에 대해 충분히 고민할 여유도 없이 고도의 경쟁 속에서 빠른 경제 성장을 이뤄왔다. 그 과정 가운데 예술인뿐 아니라 사회의 취약계층에 대한 충분한 배려가 이뤄지지 않았고, 21세기에 극심한 생활고에 시달리다 사망한 최고은 작가와 인디밴드 달빛요정역전만루홈런의 이진원씨와 같은 안타까운 사건, 그리고 코로나19로 인해, 예술정책의 미비와 이에 대한 사회적 인식이 드러나게 된 것이다. 예술을 향유할 권리만큼이나 중요한 것은, 그 예술 작품을 창작하는 예술인의 기본적인 권리가 보장되는 것이다. 여기에 예술정책의 중요성이 담겨있다.


3. 예술가에게 듣는 예술정책 이야기

나는 정책 전문가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앞으로 예술정책에 대한 글을 이어가고자 운을 띄운 이유는, 보다 많은 예술인과 향유자가 예술정책에 관심을 가져주길 바라는 마음에서이다. 예술만 열심히 해도 예술인으로서의 삶을 영위하는데 아무런 문제가 없는 사회라면, 굳이 예술이 아닌 분야에 관심을 갖지 않아도 되겠지만, 사회는 다층적이고 입체적인 구조로 구성된다. 그리고 모두 알다시피 경제가 우선인 사회에서, 상업예술이 아닌 그러니까 경제적 이윤을 가져오지 못하는 다른 분야의 예술에 대해 도외시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미디어에서 쉽게 눈에 들어올 만큼의 한 명의 스타 예술가의 성장과 발전 이면에는 수 없이 많은 예술 종사자들의 역할이 있음을 결코 잊어서는 안된다. 저변을 건강하게 만들어 더 좋은 작품을 만들 수 있도록 창작자인 예술가의 생존 환경을 돌보는 일은, 궁극적으로 건강한 시민 사회, 나아가 그토록 꿈꾸는 진정한 문화강국을 만드는데 꼭 필요한 일일 것이다.

 

부족하나마 앞으로 기록해나갈 '예술 정책 이야기'는 전문가를 위한 일이 아니다. 나와 같이 예술가의 정체성을 지켜가나고자, 예술의 현장에서 시간과 기회를 쪼개 'n잡러'의 삶을 살면서까지 고군분투하는 이들과 예술을 사랑하지만 어떻게 하면 더 나은 생태계를 만들 수 있을지 막연한 고민을 하는 이들, 그리고 앞으로 예술가의 삶을 살아가기 위해 또는 예술가로 살아갈 자녀를 교육하고 키우는 부모와 선생님을 위한 최소한의 유용한 도움이 되길 바라는 마음으로 시작하려 한다. 그리고 이 여정에 함께하는 손길이 많아질수록, 보이지 않는 수많은 예술가의 치열한 삶을 바라보는 시선이 더욱 따뜻해지길 기대해본다.

ⓒ송철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