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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과 전통음악

#12. 현존하는 산조, 현대적 계승의 길목에서 <국립국악원 기획공연 일이관지(一以寬之) : 원장현X김성아> 공연 리뷰

by ontheRoad 2024. 1. 9.

국악누리 0506월호 26쪽.

 

산조라는 왕관의 무게

전통음악 전공자들은 산조를 ‘인생이 걸린 곡’으로 처음 접한다. 우연히 산조 라는 음악을 만나 좋아서 배우게 되는 경우는 거의 없고, 대부분 치열한 경쟁 과 당락의 초조함 가운데 연습실에 틀 어박혀 음악적 완성도를 높이는 데 수년 또는 십수 년을 보낸다. 실제로도 거의 모든 대회와 오디션에서 산조는 본선을 결정짓는 중요한 곡으로 꼽힌다. 그래 서 전공자에게 산조는 ‘감히’ 즐기기 어 려운 곡이 되었다. 그렇다면 산조를 즐 길 수 있게 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 까? 적어도 음악적 완성도에 대한 스스 로의 만족감 때문은 아닐 것이다. 산조 는 평생에 걸쳐도 정복하지 못하는 ‘거 대한 산’과 같다. 어떤 명인도 스스로 산 조를 ‘완성’했다고 하지 않는다. ‘완성하 는 과정’에 있다고 할 뿐. 어쩌면 끝까지 ‘미완’으로 남겨 후대에 계승의 숙제로 넘기는 것을 미덕으로 여기는지도 모르 겠다. 현실적으로 산조를 즐긴다는 것은 때론 주변의 인정 또는 사회적 위치나, 안정적인 환경이 만들어준다. 고도의 예 술적 능력을 요구하는 장르이니만큼, 실 제로 많은 시간을 써야만 연주력을 유 지, 발전시킬 수 있다. 그래서 전통 음악 을 전공한 모든 이들에게는 ‘산조’라는 단어가 주는 나름의 무게가 있다. 그것 은 산조에 대한 책임감일 수도 있고 경 외심일 수도 있겠다. 혹 못내 이루지 못 한 아쉬움일지도 모르겠다.

 

추구하되 조화롭게

예술의 ‘수월성’과 ‘보편성’은 언제나 예 민한 화두이다. 우열을 가리고자 서열화 를 시킬 수밖에 없는 수월성은 보편성의 공격 대상이 된다. 반면 보편적 가치의 확산을 위해 예술적 수준을 타협할 수밖 에 없는 상황이 되면 보편성은 예술의 무 기력한 현주소가 되어버린다. 그렇다면 산조의 현실은 어떠한가. 아이러니하게 도 짧은 시간 동안 예술성을 지키며 계승 해간다는 명분으로 산조를 교육과 경쟁 의 굴레 안에 가두고 말았다. 장르별, 악 기별로 몇 안 되는 명인에게서 겨우 발견 할 수 있을 만큼 산조의 본질은 희소해졌 다. 그만큼 현대를 사는 수많은 전통 예 술인들은 산조를 스스로 충분히 즐기고 누릴 수 있는 정서적, 현실적 기회가 부 족하다. 그나마 요즘 이 틀을 깨고자 발 버둥 치는 몇몇 청년 예술인을 통해 위안 삼을 뿐이다.

 

(전통예술인이라면)누구나 알다시피 예술의 본질을 ‘꿰뚫어 야’ 할 현대의 산조는 통찰의 문을 굳게 닫고 ‘OOO대학교 스타일, OOO대회 스 타일, OOO악단 스타일’ 등 경쟁을 위한 족집게 도구로 전락하고 말았다. 이것은 산조의 가치를 보편화시켜야 한다는 것 과는 다른, ‘우선순위’에 대한 이야기이 다. 또한 ‘계승’이라는 거대한 흐름을 본 다면, 다양한 류파(流派)를 대하는 기준 이 주류와 비주류가 아닌 희소가치의 관 점으로 바라보아야 할 것이다. 해금 산 조만 보더라도 세 류파인 ‘한범수류’, ‘서 용석류’, ‘김영재류’는 ‘지영희류’에 비해 예술의 현장에서 여전히 그 가치를 인정 받지 못하고 있다. 예컨대, 대회에서 ‘산 조 자유곡’이라고 쓰여 있다면 당연히 ‘지영희류 해금 산조’를 연주해야 한다 는 암묵적인 분위기가 그 일례이다. 최고 의 예술을 추구하되 최선을 다해 조화를 이뤄가는 것, 산조의 본질을 살리기 위해 꼭 기억해야 할 것이다.

 

관성에서 벗어나, 다르게 바라보기 그리고 역동적으로 지켜내기

산조는 여전히 무겁고 신성하다. 산조 를 바라보는 예술가의 자전적 시선은 기 대와 만족이 아닌, 결핍과 불안이다. 만 족을 포기한 결핍은 자유가 아닌 종속 적 굴복이 된다. 산조가 자유를 향한 지 표가 아니라 그것을 기준으로 자신을 재 단하고, 타인을 비교하는 도구로 소모된 다는 뜻이다. 이것은 어린 나이부터 뼛 속까지 길들여진 나머지 ‘산조의 절대 적 기쁨’을 망각하게 만든다. ‘우수한, 탁 월한, 뛰어난, 빼어난’ 등과 같이 수월성 으로 대변되는 개념들은 성인이 된 이후 에도 내면에 남아 ‘감히’ 산조를 즐길 수 없게 만든다. 또한 이와 같은 ‘피라미드 형’ 계승 구조는 현대 사회에 이르러 다 양성과 부딪히게 된다. 장르가 무너지 고, 가치의 기준이 모호해지는 현실 가 운데 서 있다면, 관성에서 벗어나 다르 게 바라보기 위한 노력이 필요하다. 시 대의 변화에 기준 없이 편승하는 것이 계승의 근간을 흔드는 일이라면, 변화의 흐름을 타지 못하는 것은 계승의 동력을 잃어버리는 것이다.

 

산조만큼 역동적인 음악이 또 있을까. 어떤 음악 장르에도 결코 뒤 처지지 않을 만큼 치밀하고 구조적이면서 자유도(즉 흥성)가 높은 산조는 현대적 전통 계승의 올바른 방향에 대한 중요한 지표가 된다. 누가 계승의 자격이 있느냐를 치열하게 묻기에는 옛날 그 시절과 지금은 판이한 환경임이 분명하다. 지금은 전통을 지키 고 계승해온 선조들의 소중한 예술적 가 치를 조화와 균형으로 확장해 나갈 때이 다. 그런 의미에서 이번 국립국악원의 기 획공연 <일이관지(一以貫之)>는 계승의 한복판에서 증인(證人)으로 살아온 명인 들과 그들을 바라보며 새로운 계승의 지 평을 열어가는 새 세대를 관통하는 하나 의 중요한 가치를 돌아보게 해주었다. 본 질은 변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것을 둘러 싼 환경은 시시때때로 바뀔 것이다. 그 변화의 파도를 피하지 않고 역동적으로 타는 것이야말로 진정으로 계승의 가치 를 지킬 수 있는 길이 아닐까.


적막의 허리를 졸라매어

한번 태어난 놈은 썩지 않는다

물 위에 쓰러져 바람 끝에 찔려

갈가리 흩어져도

푸른 물 쭉 뽑아 올려

박자 맞추어 춤추어 본 놈은

절대로 누워버리지 않는다

푸르게 세상 끝까지 따라가서

모두 죽어도

끝까지 살아남아 흔들린다.

춤춘다.

 

- 안혜원 시 <살아있는 정물> 중

 

 

 이건명

※ 본 글은 2023 국악누리 05-06월호의 <다시보기3- 국립국악원 기획공연 일이관지(一以貫之) 원장현×김성아>에 수록된 글의 일부이며, 이 글은 한국문화예술위원회의 ‘공연예술비평활성화 지원금’으로 기고되었습니다. (원문 링크) 

 

국악누리 2023년 05-06월호 191호

<국악누리>는 국립국악원에서 발간한 국악소식지로 순수예술의 가치와 감동을 전하는 국악 공연 소식 및 생활속에 국민행복을 주는 국악문화 보급에 앞장서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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