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예술가의 시간
1. 시간의 가치
2011년에 개봉한 앤드류 니콜 감독의 영화「인타임」은 돈이 존재하지 않는 세상 속에서 비용이 시간으로 대체되는 이야기를 그린 작품이다. 영화 속 세상에서 모든 인간은 25세가 되면 신체적인 노화가 멈춘다. 대신 왼쪽 손목에 새겨진 생체 타이머를 통해 1년의 유예기간이 생긴다. 이 시간으로 사람들은 물건을 사고, 집세를 내며, 교통 수단을 이용해야 한다. 커피 1잔은 4분, 권총 1정은 3년, 그리고 스포츠카 한 대는 자그마치 59년을 지불해야 살 수 있다. 하지만 주어진 시간이 ‘0’이 되고 나면, 그 즉시 사망한다. 결국 사람들은 시간을 벌기 위해 일을 하거나 대출을 받거나 혹은, 타인의 시간을 훔쳐야만 한다. 영화 속 부자들은 소유한 시간만큼 몇 대에 걸쳐 영생을 누리며 늙지 않고 살 수 있기에 무소불위의 권력을 쥐게 된다. 그리고 주인공은 시간을 담보로 착취와 불의를 일삼는 견고한 시스템을 붕괴시키기 위해 고군분투한다. 시간을 소유한다는 가상의 세계를 묘사한 영화를 통해 시간이 지니고 있는 절대성과 현실적인 불공평함에 대해 돌아보게 된다.
시간은 누구에게나 주어지지만 결코 동일한 가치가 있는 것은 아니다. 아르바이트를 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1시간은 9,160원에 불과하지만, 유명세를 갖고 있는 누군가에게는 수천만원, 때로는 수억원의 가치가 있다. 똑같은 시간을 쓰더라도 돌아오는 대가는 전혀 다르다. 때문에 사람들은 적은 시간을 들여 보다 큰 가치를 얻을 수 있는 일을 하기 위해 집중한다. 그리고 그런 효율을 지닌 일이나, 그 일을 하는 사람들은 세간의 주목을 받으며 부러움을 산다. 그렇기 때문에 청소년기 혹은 더 어린 시절부터 가정과 학교에서 ‘꿈’이라는 이름으로 진로에 대한 고민을 할 때면, 공무원이나 교육자 또는 의사 등 일을 하는 시간 대비 효율이 높거나, 전문적인 업무의 어려움에 비해 신분의 안정이 보장되는 직업군이 절대적인 순위를 차지하게 된다.
2. 창작과 시간 - 밖
그렇다면 예술가에게 시간은 어떤 의미가 있을까? 예술가는 창작을 위해 시간을 쓴다. 공연예술, 시각예술, 문학, 무용 등 어느 분야를 막론하고 시간을 들이지 않으면 완성도 있는 작품을 만들어낼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예술가에겐 작품을 위한 넉넉한 시간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보통 ‘예술을 위한 시간’이라고 하면 무대에서 연주를 하거나 작업실에서 그림을 그리거나 또 글을 쓰는 직접적인 창작 행위만을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그 이전에 예술적 역량을 강화하고 영감을 얻기 위한 시간이 필요하다는 생각은 하지 못한다. 또한 함께 작업 할 사람을 만나 섭외를 하며 작품의 주제를 찾고 예산을 수립하는 시간 또한 필수적으로 요구된다. 즉, 예술활동을 위한 재반적인 업무를 맡아 줄 팀원 또는 조력자가 없다면 이 모든 일은 예술가 스스로 해결해야 한다. 그리고 이 행위는 곧바로 재정적인 대가로 돌아오지 않는다.
일반적인 직장을 다닌다면 아침부터 저녁까지 일을 하고 주어지는 일정한 수입이 있다.. 그리고 그 안에서 어느 정도 생활을 영위 할 수만 있다면 업무 외의 시간은 자신을 위해, 그리고 가족과 함께 보낼 수 있는 여유가 된다. 예술가의 삶 또한 아침에 일어나 하루를 보내고 다시 잠자리에 눕기까지 24시간이라는 주어진 한계 속에서 살아간다. 월세를 내고 밥을 사먹고, 교통비를 내는 등의 필수적인 소비를 위해 남들과 똑같은 조건에서 일을 해야만 일상을 영위 할 수 있는 것이다. 여기에서 예술가의 삶은 예술적 역량을 강화하고 작품을 창작하는 시간에 충분히 집중 할 수 있는지, 아니면 일상을 살아내기 위해 창작활동이 아닌 다른 일에 시간을 쏟아야만 하는지로 갈리게 된다. 전자의 환경에 놓인 예술가라면, 교육기관 또는 준비기간을 보내고 사회에 나와 전문예술인으로 안정적인 작품활동을 할 수 있는 기회가 더 많이 주어질 것이다. 후자라면 남는 시간에 힘겹게 창작활동을 하며 어렵사리 예술가로서의 삶을 이어가야만 한다. 이 두 차이는 개인의 예술적 역량이나 노력의 결과에 따라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엄연히 그를 둘러싼 환경적인 요인인 것이다.
이러한 조건을 따르지 않더라도 예술인 스스로 ‘시간의 우선순위’를 어디에 두느냐에 따라 ‘전업 예술가’와 그렇지 않은 이의 차이를 만든다. 스스로 ‘전업 예술가’의 길을 선택했다면, 여타한 수입이 부족하더라도 더 아끼고 검소한 생활을 하거나, 혹은 부모님의 도움 또는 다양한 경로를 통한 재정적인 지원 하에 어떻게든 창작을 위한 절대적인 시간을 확보할 것이다. 일반적인 직장인이 회사에서 보내는 업무시간을 ‘전업 예술가’는 누가 시키지 않아도 자신의 예술을 위해 시간을 쓰는 것이다. 하지만 이 시간에 대한 대가는 누구도 주지 않는다. 물건을 만들거나 음식을 만들어 판매를 한다면 그 행위가 곧 수입으로 직결되겠지만, 예술은 결코 그렇지 않기에 예술행위가 곧 삶의 질을 향상시켜주지 않는다. 즉, 예술가의 실력이나 창작한 작품의 수준과 상관없이 ‘예술가의 삶’은 시간의 우선순위에서부터 구별되는 것이다. “시간을 벌기 위해 써야 하는 시간”이 많이 들수록 그 예술가는 점차 예술가의 삶에서 멀어질 수 밖에 없다. 이런 면에서 예술가에게 ‘시간’이란, 자신의 존재 가치를 증명할 수 있는 기회를 주는 절대적인 가치이다. 어쩌면 영화 ‘인타임’에서의 생명을 담보로 한 시간보다도 더 간절 할 수 밖에 없는 것이 바로 ‘예술가의 시간’이 아닐까.
3. 창작과 시간 - 안
전문 연주자가 한 번의 무대를 서기 위해 어느 정도 시간을 쓸까. 작품마다 또 예술가마다 차이가 있겠지만, 완성도 있는 공연을 위해서는 한달 내지 두달 이상은 준비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여기에는 함께 모여 연습을 하는 시간 뿐만 아니라, 개인 연습실에서 홀로 작품을 완성해나가는 시간 모두 포함된다. 악기 연주자의 경우 장르와 전공을 막론하고 본 공연을 위한 연습 이외에 기본기 연습에 적잖은 시간을 할애하는데, 이는 악기를 처음 배우는 사람이든 10년 이상 된 전문 연주자이든 상관없이 모두에게 중요한 과정이다. 한음 한음 소리내는 것부터 시작하는 기본연습은 정확한 음정을 위한 스케일 연습, 테크닉(기술)이 요구되는 표현에 대한 연습과 자신에게 취약한 부분을 위한 부분 연습 등을 한 후 어느정도 손이 풀리면 본격적인 연습을 시작한다. 마치 준비 운동을 하거나, 차에 시동을 걸어 예열을 시키는 것과 비슷하다.

그렇다면 하루에 보통 어느정도 연습시간을 가져야 할까? 이 또한 연주자들마다 차이가 많을 것이다. 연습시간에 대한 좋은 예로, 존경해 마지 않는 세계적인 첼리스트 ‘파블로 카잘스’의 일화가 있다. 95세나 된 첼리스트에게 한 기자는 역사상 가장 위대한 첼리스트인 당신이 지금도 하루 6시간씩 연습에 매진하는 이유가 무엇이냐고 물었다. 파블로는 진지하게 지금도 조금씩 발전하고 있다고 믿기 때문이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또 피아노의 대가 ‘루빈스타인’ 또한 여행 중에서 조차 차 안에서 소리나지 않는 작은 피아노로 연습을 했다고 한다. 이에 대해 한 제자가 대가 답지 않게 무엇을 하는거냐고 묻자 그는 “하루를 연습하지 않으면 내가 알고, 이틀을 연습하지 않으면 아내가 알고, 사흘을 연습하지 않으면 청중이 안다”고 대답했다. 이 일화는 많은 이들에게 예술가에게 시간이란 무엇인지 다시 생각하게 한다. 어느정도 숙련이 되고 나면, 그 분야에 대해서는 여유를 부려도 전혀 문제가 없는 다른 많은 분야와는 달리, 예술가는 완성도 있는 예술 작품을 위해 평생 절대적인 시간을 써야만 하는 것이다.
작곡가는 또 어떤가. 당대 최고의 교향곡이라는 칭송을 받은 작곡가 브람스는 그의 첫 번째 교향곡을 작곡해 세상에 발표하기까지 자그마치 21년이라는 시간이 걸렸다. 이에 대해 친구가 묻자 그는 “베토벤의 위대한 발소리를 등 뒤에서 들으며 교향곡을 작곡한 다는 것이 얼마나 괴로운 일인지 아는가!”라고 답했다고 한다. 같은 시대에 살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큰 짐이 될 만큼 브람스는 베토벤의 음악세계를 존경했고, 그에 부합한 곡을 쓰기 위해 일생을 바쳐 곡을 완성한 것이다. 브람스의 교향곡 제1번은 ‘베토벤의 제10번 교향곡’이라고 표현될 만큼 후대에까지 인정받는 작품으로 남아있다. 이런 면에서 ‘예술가의 시간’이란, 단지 눈 앞에 있는 몇 시간을 얼마나 효율적으로 써서 그 이상의 성과를 내느냐의 계산으로 바라보기엔 무언가 다른 의미와 가치가 있다고 여겨야 할 것이다.
4. 시간 너머의 예술
전통음악은 크게 양반과 지식인 등 당대의 지배계층이 향유하던 음악인 ‘궁중음악’과 ‘풍류음악’ 등을 이르는 ‘정악’과 풍물, 판소리, 민요, 잡가, 무속음악 등 피지배계층에 의해 향유되던 ‘민속악’으로 나뉜다. 그리고 서양문물이 들어온 이후 새롭게 등장한 ‘창작곡’에 이어, 현대로 올수록 장르를 넘어선 새로운 음악인 ‘크로스오버’, ‘퓨전’ 등도 이젠 어엿한 전통음악의 한 장르로 자리매김했다. 요근래는 전통악기와 전통적인 음악 어법을 사용했음에도 불구하고, 스스로 락밴드, 얼터너티브 팝밴드 등으로 지칭하는 젊은 전통예술인도 등장했다. 이처럼 예술은 시대를 거쳐 다양한 정체성을 지니며 변화를 거듭해간다.
앞서 이야기한 ‘민속악’ 중 ‘산조’라는 장르가 있다. 일반적으로 산조란 느린 장단인 ‘진양’으로 시작해, 중모리, 중중모리, 자진모리 그리고 휘모리에 이르기까지 점차 빠른 장단으로 연주하는 기악 독주곡이다. 판소리 또는 무속음악에서 발생했다고 여겨지는 산조는 소리꾼 한명과 북을 치는 고수 한명을 구성되는 판소리처럼 악기 하나와 반주를 하는 장구 하나의 편성을 기본으로 한다. ‘산조(散調)’는 ‘흩어진 가락’이라는 뜻으로 자유로운 연주, 즉 ‘즉흥성’을 가장 큰 특징으로 이야기한다. 19세기 말 김창조(金昌祖)의 가야금 산조를 시작으로 거문고 산조, 대금 산조, 해금 산조가 발생했으며, 1950년 경 아쟁 산조에 이어 1960년대 초 피리 산조 또한 만들어졌다고 한다. 산조는 시대의 인정을 받는 한명의 연주자가 일평생 갈고 닦은 예술성을 집약해 만든 연주곡이다. 따라서 그 제자들이 스스의 ‘유파(流派)’를 계승해 후대에 전하고, 또 그 자신도 스승의 가락에 자신의 표현인 ‘더늠’을 덧붙여 자신만의 산조를 완성해간다.
이와 같이 산조는 시간을 넘어 다음 세대로 전해지지만 다음 세대에서도 당대의 연주자를 통해 현재성을 지니며 살아 숨쉬는 장르이다. 브람스의 교향곡 처럼 서양음악의 ‘작곡된’ 작품이 그 시대의 어법을 잘 살려 현대에 재연되는 것과는 엄연히 다른 결을 지니고 있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현대적 교육방법은 자유롭고 도전적인 계승을 이어온 전통음악인 산조를 교과서적인 모습으로 수동적이게 만들었다. 예를 들어, 스승의 산조에 자신만의 정체성을 덧입혀 자신만의 산조로 만들어가야 하는 음악이 ‘서울대 스타일, 한예종 스타일’ 등의 대학 입시에 맞추거나 ‘동아콩쿨, 전주대사습’ 등의 대표적인 콩쿨 오디션에 맞는 스타일로 정형화 된 것이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대를 관통해 현대로 전해지는 전통예술의 깊이는 듣는 이로 하여금 ‘예술의 시간’에 대해 많은 깨달음을 준다.
5. 예술가의 시간
그런면에서 왜 아직도 ‘배고픈 예술가’라는 말이 사라지지 않는지는 ‘예술가의 시간’이라는 관점으로 바라봐야 이해가 될 것이다. 예술가는 누구에게나 주어진 24시간의 한계 속에서 ‘예술’을 중심으로 시간을 쓰는 존재이다. 보다 많은 돈을 벌기위해, 일의 효율을 높이기 위해 시간을 쓰는 것이 아니라, 때로는 전혀 효율적이지 않은 선택을 하기도 하고, 무모하리만큼 시간을 소모하기도 한다. ‘호두까기 인형’을 만든 차이코프스키가 작품을 발표하던 날에는 호된 질타를 받아 절망했지만, 세상을 떠난 이후 지금도 교과서에 실릴만큼 인정을 받는 것만 보더라도 예술은 당장의 가치를 시간으로 환산할 수 있는 분야가 아니다. 물론 차이코프스키는 자신의 작품이 얼마나 사랑받는지 알 길이 없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예술가는 앞으로도 변함없이 ‘배고픈 존재’로 남을 것이다. 예술가는 ‘예술가로서의 시간’을 써야만 존재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렇게 삶의 안정을 위한 것이 아닌, ‘예술적으로 시간을 쓰기로 선택하는’ 예술가 덕분에 사람들은 시대를 막론하고 예술을 통해 감동과 위로를 누릴 수 있는 것이 아닐까. 우리가 예술을, 그리고 예술가를 다르게 바라봐야 하는 것은 이처럼 예술은 시간을 뛰어넘은 가치를 지녔기 때문이리라. 부디 이 가치를 알아보는 이가 많아지길, 그래서 현실적인 한계로 인해 훌륭한 작품을 남길 수 있는 예술인들이 자신의 가능성을 포기하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예술가의 시간은 죽음을 넘어 지금, 여기에도 어김없이 흐르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