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과 전통음악

#13. 마른 나무에 새순이 자라나는 시간(<2024 수림뉴웨이브 ‘독파(獨波)’> 리뷰)

ontheRoad 2025. 1. 3. 11:57

<2024 수림뉴웨이브 ‘독파(獨波)’> 리뷰

*이 글은 수림문화재단의 <2024 수림뉴웨이브 ‘독파(獨波)’> 아카이브에 실린 요약본의 원문입니다.

 

올해 수림문화재단의 ‘수림뉴웨이브’는 현대를 살아가는 스무 명의 전통음악인에 초점을 맞췄다. 이들을 선정한 이유가 중 가장 중요하게 생각한 것은 전통음악가로서 ‘자신만의 음악세계를 만들어온 예술가’인지에 대한 것이다. 자신만의 음악이라는 것은 특정 장르일 수도 있고 음악 스타일일 수도 있다. 또는 일관된 예술활동의 방향이거나, 삶으로 보여진 음악적 걸음일 수 있다. 세 명의 추천위원은 전문성을 담보할 수 있는 객관적인 자료들을 토대로 가능한 자신만의 길을 찾아가는 음악가를 선정하려고 애썼다. 인지도와 경력이 최우선이 아닌 수림문화재단이 제시한 화두인 ‘독파(獨波)’에 집중하며, 재단의 지원을 받는 것이 해당 예술인에게 어떤 의미가 있을지에 대해서도 심도 깊게 논의해 갔다. 그렇게 <2024 수림뉴웨이브 ‘독파(獨波)’>가 준비되었다.

 

독공(獨功)의 시간, 독파(獨波)의 기회

  전통음악에는 ‘독공(獨功)’이라는 말이 있다. 독공은 자신만의 소리를 찾기 위해 홀로 몇 달 혹은 몇 년이고 수련을 쌓는 것을 말한다. 산속에 움막을 짓거나 폭포수 옆에서 소리를 연마하는 모습을 쉽게 상상할 수 있는데, 서양의 제도권 교육이 정착된 현대로 올수록 ‘산공부’라는 이름으로 문하생들이 단체로 합숙을 들어가 따로 또 같이 훈련의 시간을 갖는 형태로 진행된다. 자신만의 연습 공간에서 매일 정기적으로 연습을 하는 것 또한 일종의 독공이라고 할 수 있겠다. 대금 명인 정약대 선생이 10년동안 매일 인왕산에 올라 나막신에 모래알을 쌓아 가득 찰 때까지 도드리를 불었는데, 어느 날 나막신의 모래 속에서 싹이 돋았다는 이야기는 독공과 관련해서 어릴 적부터 익히 들어온 예화이다.

 독공은 ‘자발적 외로움’으로 시작된다. 외부 세계와의 의도적인 단절을 통해 온전히 자신에게 집중한다. 독공은 몰입으로 이어진다. 몰입의 시간에서 음악가는 연주자로서의 역량이 강화됨은 물론 작품의 완성과 더불어 자신에 대해 더 깊이 알게 된다. 그렇게 부단히 실력을 쌓고 예술적 성장을 이뤄가는 동안 비로소 자신만의 음악적 흐름을 완성해 가는 ‘독파(獨波)’에 이르는 것이다. <2024 수림뉴웨이브 ‘독파(獨波)’>는 전통음악가로서 독파의 시간을 보내고 있는 이들에게 무대의 제공함으로써 자신을 돌아보고 대중에게 알리는 기회를 마련했다.

 

2024 수림뉴웨이브 독파(讀破)하기

  자신만의 음악세계를 구축하며 활동을 이어온 스무 명의 전통음악인을 선정하는 일은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 하지만 그만큼 즐거운 일이기도 했다. 추천위원들은 음악을 전공 분야의 균형과 활동 형태의 다양성을 고려해 상반기 열 명, 하반기 열 명의 전통음악인을 선정했다. 선정된 이들은 예상대로 저마다의 색깔이 선명하게 담긴 무대를 관객에게 선사했다.

상반기 하반기
 1. 김동근(퉁소)   <김동근, 김퉁소!>
 2. 김준영(거문고) <人-strument(인-스트루먼트)>
 3. 안정아(정가)   <빈집>
 4. 유  홍(대금)   <이너스케이프(Innerscape)>
 5. 황민왕(타악)   <독주>
 6. 공미연(민요)   <이미 살아온 미래>
 7. 박순아(가야금) <가락>
 8. 김슬지(아쟁)   <오늘의 아쟁: 두 번의 긴 숨>
 9. 오초롱(피리)   <물-들다.>
10 .김주리(해금)   <형용모순 OXYMORON>
11. 곽재혁(피리)    <변명(變名)>
12. 김현희(해금)    <작은 목소리>
13. 박우재(거문고)  <혼자서 천천히 나나>
14. 김참다운(아쟁)  <소리나무>
15. 송보라(판소리)  <소리, 이야기 그리고 우리>
16. 최휘선(양금)    <라이브 인 라이프>
17. 김화복(거문고)  <현금현금(現今玄琴)>
18. 성유진(가야금)  <CHRONOS_KAIROS(크로노스-카이로스)>
19. 김소진(판소리)  <판소리 전기수 프로젝트-낭(囊)만좌중>
20. 강민수(타악)    <광대>

<2024 수림뉴웨이브 ‘독파(獨波)’>의 상·하반기 라인업

 

  <2024 수림뉴웨이브 ‘독파(獨波)’>의 특징은 크게 세 가지로 정리 할 수 있다. 첫째는 ‘독주’와 ‘자연음향’이라는 공통적인 공연의 컨셉을 지향했다는 것이다. 이점은 연주자들에게도 큰 도전이 된다. 개인 독주회나 오디션, 콩쿨 등과 같은 경우를 제외하고 ‘독주’의 형태로 공연을 하는 기회는 생각보다 드물다. 다른 연주자와 함께 무대를 채우는 앙상블이 아닌 홀로 무대를 이끌어가는 것은 또 다른 연습을 필요로 한다. 마이크나 이펙터 등과 같은 음향기기를 쓰는 것이 일반화된 요즘은 기계의 도움 없이 순수한 악기 소리를 들을 기회가 또한 흔치 않다. 이것은 연주자에게뿐 아니라 관객에게도 의미 있는 시도라고 보여졌다. 의도적인 한계는 또 다른 몰입을 가져오는 장치가 되기도 한다. 백화점에 창문과 시계가 없으므로 인해 쇼핑에 더욱 몰입하게 만드는 효과와 같다고 볼 수 있다. 별도의 음향장비 없이 홀로 연주하는 시간으로 인해 음악가로서의 자신에게 집중하게 되며, 관객은 무대의 화려함이 아닌 연주자의 음악세계에 더욱 몰입할 수 있다.

  둘째는 작품 중심이 아닌 예술가 중심의 색깔을 띠었다는 점이다. 특히 이번 공연에서는 짧은 시간이지만 연주자와 직접 대화를 나누는 시간을 비중 있게 다뤘다. 작품에 대한 소개와 감상만으로 예술가를 상상하고 평가하는 것이 아닌 공연의 준비 과정에 대한 이야기와 평소 음악가로서의 생각을 들을 수 있는 기회였다. 이를 위해 매 공연마다 ‘말 거는 사람’이 세워져 연주자의 이야기를 이끌어냄으로써 관객과 적절한 소통의 매개가 되었다. 특히 이 역할은 세 명의 추천위원 외에 수림문화재단의 구성원들이 함께하면서 그 의미가 더해졌다. 드러나지 않는 자리에서 행정업무를 담당하는 재단의 구성원이 직접 무대에서 예술가와 대화를 나눈다는 것은 예술의 현장에 보다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공감하고자 하는 재단의 의지로 읽혔다.

  마지막으로 선정 예술인의 연령대가 30대 중반에서 50대까지 중견 연주자를 중심으로 이루어졌다는 것이다. 이것은 지원의 대상을 바라보는 관점이 ‘성장을 위한 지원’이 아닌 ‘지속을 위한 지원’이라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최근까지도 공적 지원의 주요 대상은 대학을 졸업한 후 전문연주자로 성장해 나가는 20~30대의 청년 그룹이 주를 이룬다. 40대 이후의 연주자는 악단 등의 단체에 소속되어 있지 않다면 외부의 지원 없이 스스로 예술활동을 지속해야만 하는 현실이다. 따라서 올해의 수림뉴웨이브는 공공지원제도의 사각지대를 찾아 해소한다는 사회적 의미로도 해석할 수 있다.
  연주자들은 기대한 만큼 자기만의 다양한 음악가적 면모를 보여주었다. 독창성을 찾아 끊임없이 탐구하고 창작해 가거나, 전통음악을 성실히 갈고 닦으며 창작곡에 있어서는 작곡가의 작품에 충실히 반응해 나가는 이도 있었다. 혹은 일상 가운데 어떻게 음악을 지속해 가는지 허심탄회한 이야기를 들려주기도 했다. 이 과정에서 이들 중견 연주자들은 엄마로서의 무게감과 가장으로서의 부담감, 혹은 스승으로서의 책임감이나 끝까지 실력 있는 음악가로 살고자 하는 열정 등을 나누며 사회적 역할을 감당하는 음악가로서의 입체적인 삶을 살고 있음을 깨닫게 해주었다. 이것은 ‘독파’라는 공통 분모를 가진 동시대 연주자 스무 명을 통시적으로 만나는 기획이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또한 완성형에 가까운 연주력이 보장된 만큼 그 너머의 이면(裏面)을 발견할 수 있는 여유를 준 <수림뉴웨이브>만의 기획이기도 했다.

  독파(獨波). 자신만의 흐름을 만든다는 것은 무엇일까? 진정한 ‘독파’는 스스로를 극복해야 할 미완(未完)의 대상으로만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자신을 뛰어넘어’, ‘누구보다 뛰어난’, 그런 성과 지향적 목적이 아닌 자신에 대한 신뢰를 바탕으로 주어진 자리에서 나다운 음악세계를 구축해 나가는 과정을 지켜내는 것이야말로 독파의 핵심이 아닐까 싶다. 여기까지 정리가 되고 나니 지난 스무 번의 공연들이 새롭게 보였다. 한 출연자의 말마따나 한가지 컨셉의 공연을 스무 번 반복한 것이 아니라 스무 명의 연주자에게 맞춘 공연을 매회 새롭게 진행한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공간의 한계로 인한 어려움 등 현실적인 문제들은 분명 개선되어야 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느 공연장에서 보기 힘든 ‘무언가’를 참여 음악가뿐 아니라, 관객이 함께 느꼈다는 것은 분명 기획의 의도가 잘 반영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지금(只今)의 전통(傳統)

  “시대가 변하고 있다”는 말은 어느 시대나 사용되었다. 그러나 기술, 이념, 자본 등 각 시대를 주도하는 주요 가치는 때때마다 새롭게 정의된다. 그런 의미에서 21세기는 ‘문화의 시대’라고 말한다. 문화가 정치·경제·외교·산업 등에 미치는 영향은 이전 어느 시대보다 커졌다. ‘문화’라는 가치가 21세기를 이끌어가는 것이다. 그러나 현대사회는 문화의 본질적인 가치를 추구하기보다 문화를 소비하는 데 집중하고 있다. 특히 영화, 게임, K-POP, 웹툰, 한식 등 ‘K-콘텐츠’로 대변되는 문화예술콘텐츠는 소비문화 조성을 위한 효과적인 도구로 활용된다. 전통예술도 빼놓을 수 없다. 문화가 소비되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이나, 이 과정에서 예술이 도구화, 대상화 되어가는 흐름은 바람직하지 않다. 궁극적으로 생산자인 예술인이 생존을 위해 어쩔 수 없이 소비재로서의 예술활동에 매몰되는 환경을 만들어내기 때문이다. 마치 인류가 혁신의 이름으로 대자연의 자원을 고갈시키며 당당하게 소멸의 시간을 앞당기고 있는 것처럼, 현대사회는 예술적 자원을 바쁘게 소비하느라 예술가들이 예술의 우물에서 깊은 영감을 길어 올릴 틈을 쉽게 허락하지 않는다.

  전통음악은 ‘함부로 변하지 말아야 한다’는 생각과 ‘시대의 흐름에 맞게’ 혹은 ‘그보다 앞서서’ 변해야 한다는 생각이 공존하며 계승되었다. 특히 21세기 전통음악 형상(形相)의 틀을 만들어낸 20세기에는 외세의 침략 속에서 식민국가로서의 무기력한 현실적 모순을 끌어안고 저마다의 선택을 해나갔다. 이윽고 찾아온 광복의 영광도 잠시, 한민족은 둘로 나뉘었으며 한국전쟁 이후 정치·경제의 불안정한 상황 속에서 민족의 전통을 계승하고 발전시키기 위해 노력했다. 이렇게 맞이한 새로운 100년의 시대이다. ‘지금(只今)의 전통(傳統)’은 지난 100년간 전통예술인들이 선택해 온 무수한 결과들의 과정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이 시대라고 크게 다르지 않다. 여전히 전통음악은 계승과 발전이라는 소명 아래, 대중의 무관심 속에 단절될지 모른다는 불안감과 무섭게 변화하는 자본과 기술의 시대에서 도태될지 모른다는 두려움에 놓여 있다.

  그렇기 때문에 이번 <2024 수림뉴웨이브 ‘독파(獨波)’>에서 만난 스무 명의 중견 전통음악인들이 지닌 가치는 결코 가볍지 않다. 왜냐하면 현대의 불안과 두려움이 만연한 가운데서도 자신만의 음악을 ‘독파’해 온 이들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대중적 인지도 또는 사회적 지위를 떠나 존재만으로 충분히 전통음악의 계승에서 중요한 위치에 있다는 것을 말한다. 100년 전 우리 선조들이 ‘조선의 음악’을 저마다의 모양으로 독파해 온 것처럼 이들은 현대의 전통음악을 자신의 언어로 독파해 가는 중이다. 이것이 우리음악의 미래가 될 것이고, 현재가 될 것이다.

 

수림(水林), 마른 나무에 새순이 자라는 시간

  분주한 현대의 예술가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독공을 위한 절대적인 시간이다. 그러나 성인이 되어 나이가 들수록 시간을 벌기가 그렇게나 어렵다. 돌이켜보면 성인기 이전 가정과 학교의 울타리 안에서 맘 편히 시간을 쓸 수 있었던 것은 큰 혜택이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시간을 마음껏 쓸 수 있다는 것은 그만큼 노동으로부터 해방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노동으로써의 예술을 충분히 인정받지 못하는 정책 구조상, 예술가에게 독파의 시간을 위한 지원을 이뤄내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정부 예산을 기획하는 과정이 예술인의 입장만을 고려하지 않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미디어 중심의 예술시장의 경제 구조에서 살아남기 위해 효율과 성과 위주의 상업적 가치가 중요해진 현실에서 더 큰 이유를 찾을 수 있다.

 뜬구름 잡는 이야기처럼 들릴지 모르지만, 예술가를 가장 잘 돕는 것은 예술가에게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는 것일지도 모른다. 예술가로 살기로 결심한 사람들은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할지 스스로 찾아가기 때문이다. 존재의 가치를 증명해야 하는 예술가의 필연적 삶은 예술이 지극히 개인적이면서도 지극히 사회적이라는 것을 방증한다. 한 삶의 예술가를 한 그루의 나무로 비유한다면 나무를 잘 키워 숲을 이루게 하는 일이야말로 예술을 향유하고 지지하는 이들이 도와야 할 궁극적인 목적일 것이다.

 수림(秀林)문화재단은 공공지원기관이 하지 못하는 다양한 시도를 할 수 있는 장점을 지니고 있다. 설립자이신 동교(東喬) 김희수(金熙秀, 1924~2012) 선생의 유지를 받들어 전통예술을 숲을 가꿔온지 15년 동안 변함없는 애정으로 걸어왔다. 이번 <2024 수림뉴웨이브 ‘독파(獨波)’>는 ‘가장 수림문화재단다운 사업’이 아니었을까, 감히 평가를 내려본다. 아무도 관심을 두지 않는 마른나무 곁에서, 계절이 지나도록 새순이 자라는 시간을 기다려주는 곳이 되길, 조용하지만, 은근한 마음으로 끝까지 남아주길 응원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