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과 전통음악

#12. 현존하는 산조, 현대적 계승의 길목에서 <국립국악원 기획공연 일이관지(一以寬之) : 원장현X김성아> 공연 리뷰

ontheRoad 2024. 1. 9. 16:46

국악누리 0506월호 26쪽.

 

산조라는 왕관의 무게

전통음악 전공자들은 산조를 ‘인생이 걸린 곡’으로 처음 접한다. 우연히 산조 라는 음악을 만나 좋아서 배우게 되는 경우는 거의 없고, 대부분 치열한 경쟁 과 당락의 초조함 가운데 연습실에 틀 어박혀 음악적 완성도를 높이는 데 수년 또는 십수 년을 보낸다. 실제로도 거의 모든 대회와 오디션에서 산조는 본선을 결정짓는 중요한 곡으로 꼽힌다. 그래 서 전공자에게 산조는 ‘감히’ 즐기기 어 려운 곡이 되었다. 그렇다면 산조를 즐 길 수 있게 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 까? 적어도 음악적 완성도에 대한 스스 로의 만족감 때문은 아닐 것이다. 산조 는 평생에 걸쳐도 정복하지 못하는 ‘거 대한 산’과 같다. 어떤 명인도 스스로 산 조를 ‘완성’했다고 하지 않는다. ‘완성하 는 과정’에 있다고 할 뿐. 어쩌면 끝까지 ‘미완’으로 남겨 후대에 계승의 숙제로 넘기는 것을 미덕으로 여기는지도 모르 겠다. 현실적으로 산조를 즐긴다는 것은 때론 주변의 인정 또는 사회적 위치나, 안정적인 환경이 만들어준다. 고도의 예 술적 능력을 요구하는 장르이니만큼, 실 제로 많은 시간을 써야만 연주력을 유 지, 발전시킬 수 있다. 그래서 전통 음악 을 전공한 모든 이들에게는 ‘산조’라는 단어가 주는 나름의 무게가 있다. 그것 은 산조에 대한 책임감일 수도 있고 경 외심일 수도 있겠다. 혹 못내 이루지 못 한 아쉬움일지도 모르겠다.

 

추구하되 조화롭게

예술의 ‘수월성’과 ‘보편성’은 언제나 예 민한 화두이다. 우열을 가리고자 서열화 를 시킬 수밖에 없는 수월성은 보편성의 공격 대상이 된다. 반면 보편적 가치의 확산을 위해 예술적 수준을 타협할 수밖 에 없는 상황이 되면 보편성은 예술의 무 기력한 현주소가 되어버린다. 그렇다면 산조의 현실은 어떠한가. 아이러니하게 도 짧은 시간 동안 예술성을 지키며 계승 해간다는 명분으로 산조를 교육과 경쟁 의 굴레 안에 가두고 말았다. 장르별, 악 기별로 몇 안 되는 명인에게서 겨우 발견 할 수 있을 만큼 산조의 본질은 희소해졌 다. 그만큼 현대를 사는 수많은 전통 예 술인들은 산조를 스스로 충분히 즐기고 누릴 수 있는 정서적, 현실적 기회가 부 족하다. 그나마 요즘 이 틀을 깨고자 발 버둥 치는 몇몇 청년 예술인을 통해 위안 삼을 뿐이다.

 

(전통예술인이라면)누구나 알다시피 예술의 본질을 ‘꿰뚫어 야’ 할 현대의 산조는 통찰의 문을 굳게 닫고 ‘OOO대학교 스타일, OOO대회 스 타일, OOO악단 스타일’ 등 경쟁을 위한 족집게 도구로 전락하고 말았다. 이것은 산조의 가치를 보편화시켜야 한다는 것 과는 다른, ‘우선순위’에 대한 이야기이 다. 또한 ‘계승’이라는 거대한 흐름을 본 다면, 다양한 류파(流派)를 대하는 기준 이 주류와 비주류가 아닌 희소가치의 관 점으로 바라보아야 할 것이다. 해금 산 조만 보더라도 세 류파인 ‘한범수류’, ‘서 용석류’, ‘김영재류’는 ‘지영희류’에 비해 예술의 현장에서 여전히 그 가치를 인정 받지 못하고 있다. 예컨대, 대회에서 ‘산 조 자유곡’이라고 쓰여 있다면 당연히 ‘지영희류 해금 산조’를 연주해야 한다 는 암묵적인 분위기가 그 일례이다. 최고 의 예술을 추구하되 최선을 다해 조화를 이뤄가는 것, 산조의 본질을 살리기 위해 꼭 기억해야 할 것이다.

 

관성에서 벗어나, 다르게 바라보기 그리고 역동적으로 지켜내기

산조는 여전히 무겁고 신성하다. 산조 를 바라보는 예술가의 자전적 시선은 기 대와 만족이 아닌, 결핍과 불안이다. 만 족을 포기한 결핍은 자유가 아닌 종속 적 굴복이 된다. 산조가 자유를 향한 지 표가 아니라 그것을 기준으로 자신을 재 단하고, 타인을 비교하는 도구로 소모된 다는 뜻이다. 이것은 어린 나이부터 뼛 속까지 길들여진 나머지 ‘산조의 절대 적 기쁨’을 망각하게 만든다. ‘우수한, 탁 월한, 뛰어난, 빼어난’ 등과 같이 수월성 으로 대변되는 개념들은 성인이 된 이후 에도 내면에 남아 ‘감히’ 산조를 즐길 수 없게 만든다. 또한 이와 같은 ‘피라미드 형’ 계승 구조는 현대 사회에 이르러 다 양성과 부딪히게 된다. 장르가 무너지 고, 가치의 기준이 모호해지는 현실 가 운데 서 있다면, 관성에서 벗어나 다르 게 바라보기 위한 노력이 필요하다. 시 대의 변화에 기준 없이 편승하는 것이 계승의 근간을 흔드는 일이라면, 변화의 흐름을 타지 못하는 것은 계승의 동력을 잃어버리는 것이다.

 

산조만큼 역동적인 음악이 또 있을까. 어떤 음악 장르에도 결코 뒤 처지지 않을 만큼 치밀하고 구조적이면서 자유도(즉 흥성)가 높은 산조는 현대적 전통 계승의 올바른 방향에 대한 중요한 지표가 된다. 누가 계승의 자격이 있느냐를 치열하게 묻기에는 옛날 그 시절과 지금은 판이한 환경임이 분명하다. 지금은 전통을 지키 고 계승해온 선조들의 소중한 예술적 가 치를 조화와 균형으로 확장해 나갈 때이 다. 그런 의미에서 이번 국립국악원의 기 획공연 <일이관지(一以貫之)>는 계승의 한복판에서 증인(證人)으로 살아온 명인 들과 그들을 바라보며 새로운 계승의 지 평을 열어가는 새 세대를 관통하는 하나 의 중요한 가치를 돌아보게 해주었다. 본 질은 변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것을 둘러 싼 환경은 시시때때로 바뀔 것이다. 그 변화의 파도를 피하지 않고 역동적으로 타는 것이야말로 진정으로 계승의 가치 를 지킬 수 있는 길이 아닐까.


적막의 허리를 졸라매어

한번 태어난 놈은 썩지 않는다

물 위에 쓰러져 바람 끝에 찔려

갈가리 흩어져도

푸른 물 쭉 뽑아 올려

박자 맞추어 춤추어 본 놈은

절대로 누워버리지 않는다

푸르게 세상 끝까지 따라가서

모두 죽어도

끝까지 살아남아 흔들린다.

춤춘다.

 

- 안혜원 시 <살아있는 정물> 중

 

 

 이건명

※ 본 글은 2023 국악누리 05-06월호의 <다시보기3- 국립국악원 기획공연 일이관지(一以貫之) 원장현×김성아>에 수록된 글의 일부이며, 이 글은 한국문화예술위원회의 ‘공연예술비평활성화 지원금’으로 기고되었습니다. (원문 링크) 

 

국악누리 2023년 05-06월호 191호

<국악누리>는 국립국악원에서 발간한 국악소식지로 순수예술의 가치와 감동을 전하는 국악 공연 소식 및 생활속에 국민행복을 주는 국악문화 보급에 앞장서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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