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과 전통음악

#9. 예술가의 삶, 네 번의 질문

ontheRoad 2022. 5. 8. 16:52

#1. 예술,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술가하면 어떤 이미지가 떠오르는가? 예술을 향유하는 일반 대중이라면, 으레 브라운관에서 스포트라이트를 한 몸에 받는 스타를 떠올릴 것이다. 혹은 세계적인 콩쿨에서 우승을 한, 유례 없는 업적을 남긴 클래식 연주자가 떠오를 수도 있다. 예술을 소비하는데 익숙한 사람에게는 당연한 일이다. 브로드-웨이의 뮤지컬이 한국에 상륙한다고 하면, 기십만원을 지불하는 것이 전혀 아깝지 않다. 이렇게 시장의 값어치가 있는 예술을 소비하는 것에는 전혀 거리낌이 없지만, 미래의 예술적 가능성에 지갑을 여는 것은 왠지 모르게 아까운(?) 마음이 든다. 또 이것은 소비가치가 높은 아티스트를 선발하는 오디션 프로그램이 손에 땀을 쥐게 하는 이유가 되기도 한다. 수백, 수천 대 일의 경쟁을 뚫고 드디어 몸값을 보장 받고 나면, 그것이 곧 인생의 보증 수표가 된다. 그리고 그 외 모든 이들은 기억에서 잊혀진다.

 

이 이야기는 비단 현대 사회에서만 벌어지는 일이 아니다. 오랜 역사 속 우리와 친근한 예술가의 삶에서도 쉽게 발견할 수 있다. 모차르트의 누나인 난네를(마리아 안나 모차르트)’과 멘델스존의 누나 파니 멘델스존의 삶을 들여다보면 누구 못지 않게 뛰어난 예술성을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결국 동생의 그늘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대중에게 잊혀져버린 것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재미있는 사실은 평생 들러리로서의 삶을 산 예술인들 중 끝까지 포기하기 않고 자신만의 예술세계를 성실히 구축한 이들이 많다는 것이다. 이들은 이름을 남기지는 못했지만 대신 무수한 작품을 남겼다. 무슨 이유에서였을까? 아마도 언젠가는 나도..’라는 보상 심리에 의한 기다림이 아니었을 것이다. 예술 그 자체,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예술세계에 모든 가능성을 걸고 삶을 살아낸 이들이었다는 것을 꼭 기억해야 한다. 그렇다면 무엇이 그들을 끝내 예술가로 살게 했을까? 예술가는 무엇으로 사는가?에 대한 질문을 하지 않을 수 없다.

 

#2. 예술가는 무엇으로 사는가?

톨스토이는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를 통해 독자에게 세 가지 질문을 던진다. “사람의 마음 속에는 무엇이 있는가?”, “사람에겐 자신의 미래를 내다보는 지혜가 있는가?”, 그리고 마지막으로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이다. 이 소설은 하나님께 벌을 받고 위 세 질문에 대한 답을 얻을 때까지 세상으로 쫓겨난 천사 미하일과 그를 거두어 자신의 집에서 돌봐준 가난한 구두장이 시몬이 만나는 사건으로 시작 된다. 이야기의 말미에 미하일은 시몬에게 자신이 깨달은 세 가지 질문에 대한 답을 들려준다. 그는 시몬과의 만남을 통해 하나님의 마음에는 하나님의 사랑이 있다는 것을 깨달았고 귀족 신사와의 만남으로 인간에게는 자신의 미래를 내다보는 지혜가 없다는 것을 알았다고 했다. 마지막으로 엄마를 잃은 아이들을 사랑으로 키우는 부인을 만나고 사람은 사랑으로 산다는 진리를 깨달았다는 말을 마치고 하늘로 돌아간다. 이 소설은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실천하지 못하며 민중들과 멀어진 당시 기독교에 대한 비판의식을 담고 있다. 이런 면에서 이야기 속 세 가지 질문은 그리스도인이 품어야 할 중요한 가치를 깨닫게 한다. 사람의 마음속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을 통해 미래를 내다볼 수 없는 인생들이 끝내 이웃을 사랑하며 살아가기를 바라는 작가의 진심이 담겨 있는 것이다. 결국 이 세 질문은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라는 핵심 질문으로 모아진다.

 

예술가의 관점에서 보자면, 질문의 내용 이전에 질문을 던진 톨스토이라는 예술가가 보인다. 작가로서 독자에게 던지는 질문은 결국 자기 자신을 향해 있다. 사랑이 메마른 세상을 향해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라고 물으며 역사에 길이 남을 문학 작품으로 승화시킨 것은, 예술가라는 정체성이 지닌 통찰의 힘이 얼마나 위대한지 느끼게 해준다. 정체성은 자기 자신을 정의 내리는 과정이다. 일반적으로 정체성이란 성별, 직업, 소속, 직책 등에 따라 부여되는데, 이 모든 것들은 온전한 자기 자신이 아닌 외부로부터의 상대적인 역할로 규정되기 마련이다. 이점에서 예술가의 정체성은 다른 분야와 달리 누구도 섣불리 규정지어질 수 없다는 특징이 있다. 예술가의 예술 세계는 지극히 개인적이기 때문에 외부적인 한계와 압박 속에서도 결국 자기 자신이 선택해나가야 한다. 취업을 위해 또는 승진이나 합격 등 외부의 인정을 받기 위해 하는 모든 행동들은 진정으로 자신만의 선택이라고 볼 수 없다. 이로부터 부여된 정체성 또한 마찬가지이다. 사람은 스스로 부여한 정체성이 견고할 때 비로소 자기 자신이 누구인지 깨닫게 되고 스스로의 삶에 주인 의식을 가질 수 있다. 그런면에서 예술가의 가장 큰 무기는 바로 정체성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스스로 부여한 예술가라는 정체성은, 그 삶이 끝 없는 광야 길 위에 있을지라도 예술 하나로 자족할 수 있게 해준다.

 

#3. 그래서 예술가는 무엇으로 사는가?

우리나라의 예술가는 대부분 예술 전문 교육기관에서 양성된다. ‘도제식 교육이 주를 이뤘던 전통예술의 계승방식에서 벗어나 서양식 교육을 수용했기 때문이다. 체계적인 예술교육 시스템은 전문예술 교육기관을 중심으로 운영되는데, 이를 통해 각각의 예술분야를 전공별로 촘촘하게 나눠 우수한 예술 전문가 양성에 큰 성과를 거두었다. 하지만 이에 반해 구전심수(口傳心授)’의 정신과 가무악일체(歌舞樂一體)’의 전통적 가치를 상실한 대가는 서양식 교육의 도입에 따른 성과로 덮을 수 없을 만큼 치명적이다. 전통예술 계승의 핵심은 사람 대 사람의 직접 계승을 통해 예술적 사상과 철학을 부여하는 것이었다. 물론 도제식 교육의 문제점도 있지만, 체계적 교육 시스템 안에서 레슨과 수업 위주의 일방적인 기술 주입식 교육은, 스승의 삶 전체를 함께 공유하며 전인격적으로 예술 정신을 계승하는 것과는 감히 그 가치를 비교 할 수 없다. 조금만 생각해보면 스승과 함께 일상을 보내는 가운데 과연, 예술적 성과만 있었을까, 라는 질문을 충분히 해볼 수 있다. 어쩌면 그보다는 스승이 마주했을 갈등과 고민, 좌절과 실패가 훨씬 많지 않았을까? 그 가운데 모두 그런 것은 아니었겠지만- 스승이 끝내 예술의 길을 선택하며 예술가로서의 자존감을 붙들고 지켜가는 과정을 목도했을 것이다. 스승의 가르침을 통해 얻은 예술적 성과가 예술가로서의 자부심과 자존심을 키워줬다면, 스승의 예술적 고난을 함께 겪음으로 인해 예술가로서의 자존감을 지켜가지 않았을까 상상해본다.

 

무엇보다 현대식 교육에서는 이 과정이 생략되었다. 누구도 반박할 수 없는 무한경쟁 시스템에 매몰된 예술교육이라는 현실에서 과연, 예술가의 자존감은 존재하는가? 이렇게 훌륭한 교육 시스템과 교육기관이 넘쳐남에도 불구하고, 채 꽃 피우기도 전에 예술가의 길을 그만두는 예술인이 날이 갈수록 늘어나는 이유는 무엇일까? 예술가의 먹고 사는 문제가 최대의 화두였다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다. 그렇다면 현대의 예술가들에게 존재의 이유가 무엇이 되는지에 대해 진지하게 돌아봐야 할 것이다. 예술가의 예술가됨은 누가 부여하는 것인가? ‘예술가의 자격은 누가 결정하는 것인가. 기회비용으로만 따져봐도, 짧게는 5년 길게는 10년 이상의 준비 기간을 기꺼이 감내하며 청춘을 바쳐 동료와의 잔인한 경쟁을 통해 겨우 사회에 내던져진다. 하지만 결국 깨닫게 되는 현실은 그런 자신이 사회에 나올 준비가 아무것도 안되었다는 것이다. 예술과 사회의 괴리. 이것이 현대 예술교육 시스템의 가장 큰 문제점이라고 볼 수 있다. 이에 따른 예술가의 자존감 상실, 그 어떤 사회적, 물질적 기회 앞에서도 자신의 존재를 무력하게 만든다. 아무리 뛰어난 예술적 기량과 성과를 가진 예술가라 할지라도 스스로의 존재에 대한 가치를 부여하지 못한다면 결국 무너질 수 밖에 없다. 그런면에서 예술가에게 자존감이란 인간으로서 존중 받는 것, 그 이상의 의미가 있다.

 

#4. 그렇다면 예술가는 무엇으로 사는가?

세월호 참사로 한창 세상이 시끄러울 때, 모두를 숙연하게 만든 사건이 있었다. 바로 단원고 2학년 3반 담임이었던 김초원 선생님의 이야기이다. 기간제 교사였던 김초원 선생님은 세월호 참사 당시 학생들이 있던 4층으로 내려가 학생들에게 구명조끼를 입혀주고 끝까지 탈출을 돕다가 결국 배 밖으로 나오지 못했다. 마지막까지 교사로서의 책임을 다 한 것이다. 하지만 학교에서는 김초원 선생님이 기간제 교사라는 이유로 생명보험은 물론이고 여행자보험도 가입 해주지 않았다는 것이 알려졌다. 생명 앞에서의 차별에 분노한 아버지가 3년간 소송을 이어갔지만, 결국 법원은 학교의 편을 들어주었다. 김초월 선생님이 기간제 교사라는 이유에서다. 아버지의 분투 끝에 2017년 문재인 대통령의 지시로 순직은 인정됐지만, 그것이 기간제 교사라는 사회적 차별에 대한 인정은 아니었다. 이와 같은 일련의 사건을 계기로 개인의 자긍심과 사회적 자긍심에 대한 고민을 이어가게 되었다. 김초원 선생님의 순직은 교사로서 개인의 자긍심을 지킨 한 교사에 대해 사회에서 자긍심을 지켜주지 못한 사례라고 생각한다.

 

자긍심은 스스로에게 긍지를 가지는 마음이다. 자신에게 당당한 감정은 정직하게 최선을 다했을 때 느낄 수 있다. 또한 타인을 통해 느끼기도 하는데, 월드컵이나 올림픽 등의 스포츠 경기에서 우리나라 선수나 팀이 경기를 할 때, 또 세계적인 무대나 콩쿨에서 국내 예술가가 멋진 무대를 만들어 낼 때 국민으로서의 자긍심을 느낀다. 근래의 대표적인 예는 뭐니뭐니 해도 ‘BTS’일 것이다. 세계적인 팬덤 아미의 영향력은 누구보가 크며, BTS의 인기는 세대와 계층을 모두 아우른다. 심지어 일명 ‘BTS병역연기법이 발의되기도 했는데, 병역 연기가 아닌 면제를 해야한다는 국민적 정서가 모아지기도 했다. 또 한편으로는 김초원 선생님과 같이 타인을 위한 자발적 헌신과 희생에서 느끼는 자긍심이 있다. 자신을 버리는 선택은 한계를 극복한 성과를 거두는 것과 전혀 다른 차원이기 때문에 전세계적인 존경을 받는다. 이처럼 자긍심은 자기 자신에서 나아가 타인을 향해 있다.

 

예술가에게 자긍심이란 무엇일까. 기본적으로 자신의 작품과 활동이 타인에게 인정 받았을 때 주어지기도 하지만 그것과는 상관없이 예술가 스스로 부여하는 자긍심이라면, 지속가능한 예술활동을 할 수 있는 동기를 부여하기에 충분하다. 당장은 아무도 알아주지 못하고, 뚜렷한 성과가 없을지라도 예술활동 자체에 대한 책임감과 자부심이 있다면, 갑작스러운 예술적 위기 가운데에서도 의연하게 대처할 수 있을 것이다. 반면 스스로 부여한 자긍심이 낮을 수록 작품에 대한 자신감과 활동을 지속할 용기 또한 부족할 수 밖에 없다. 다른 예술가를 향한 존중, 그리고 자신과 색깔이 다른 작품을 포용하는 것도 자긍심에서 비롯된다고 생각한다.

 

#5. 결국, 예술가는 무엇으로 사는가?

네 번의 끈질긴 질문까지 왔다면 예술가의 삶은 저녁이 있는 삶과 같은 여유보다 생존 너머의 예술이라는 말이 주는 치열함이 더 어울린다는 느낌이 들 것이다. 묻고 또 물어도 답을 얻을 수 없을 것 같은 이 질문에 딱 맞는 대답을 찾을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인기는 없어도 예술가로서의 정체성과 자존감, 그리고 자긍심을 지키기 위해 부단히 애써온 한 명의 예술가로써 내릴 수 있는 답은, ‘혼자가 아닌 더불어 함께라는 것이다. 인간은 스스로 존재할 수 없다. 예술 활동과 작품 창작에서 존재의 의미를 찾는 예술가라면 더욱 그렇다. 아이러니하게도 독방에 스스로를 가둔 채 고뇌하며 겨우 하나의 작품을 완성하는 예술가야말로 타인과의 관계와 외부와의 상호작용이 없이는 예술적 영감을 확장하거나 발전시킬 수 없다. 하지만 현실은 냉혹하다. 예술가의 끈질긴 고뇌의 시간을 기다려주지 않는다. 나이가 들수록 예술적 성과가 삶을 영위할 기회를 가져오지 못한다면 지속가능한 예술 활동은 어려울 수밖에 없다. 한편으로는 어릴 적부터 배워온 저 고귀한 예술이 것이 사실은 세상이 만들어낸 신기루가 아닐까 싶다. 예술의 순수성을 위해 세속의 때를 묻히지 말아야 한다는 선입견에 싸여 진짜 모습을 알지 못한 채 평생 이상만 좇다 끝나는 삶이 예술가의 운명일지도 모른다. 또 어쩌면 예술가야말로 하늘의 질문을 품은 채 세상에서 답을 얻기 위해 내려온 미하일이 아닐까.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예술이야말로 삶 가운데 냉정하게 존재해야 한다. 모두가 현실에 매몰되어 본질을 잊을 때, 용감히 경종을 울릴 수 있는 존재가 바로 예술가이기 때문이다. 한편으로는, 예술가의 손에서 떠난 작품은 이미 개인의 소유가 아니다. 어떤 모양으로든 사람들의 눈과 귀를 자극해 생각과 고민을 하게 만드는 공공의 소유가 된다. 모든 예술은 저마다 나름의 가치를 사람들에게 선사한다. 심지어 같은 작품이라도 감상자에 따라 전혀 다르게 느껴진다. 때로는 거리의 이름 없는 예술가의 연주가 삶의 의미를 잃어버린 이에게 다시 살 용기를 주기도 한다. 평생을 바쳐 완성한 작품이 비록 당대에 인정받지 못하더라도 후대에 큰 반양을 주어 역사적인 반열에 오르기도 한다. 이렇게 예술은 시공간을 초월한 가치를 머금고 있다.

 

결국 이런 예술이, 예술가가 생존하기 위해서는 이에 대한 이해와 신뢰가 뒷받침 되어야 한다. 정부는 예술이 사회에 뿌리내릴 수 있도록 예술 현장에 맞는 제도와 정책을 만들어야 한다. 상품성이 있는 예술에만 관심을 가질 게 아니라, 보다 넓고 깊은 안목으로 예술을 바라봐야 한다. 다양한 예술세계를 포용할 수 있는 사회야말로 공동체적 가치가 살아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무엇보다 예술 이전에 예술가라는 생각을 꼭 해야한다. 자유롭고 적극적인 예술활동이 보장된 사회, 예술가의 생리를 이해하고 예술가적 삶을 영위할 수 있는 사회가 된다면 삶의 풍요를 가져오는 좋은 작품이 많아질 수 밖에 없다. 예술가 또한 목소리를 모아가야 할 것이다. 예술 활동과 더불어 함께 사는 사회에도 관심을 갖고 주변 가까운 곳부터 조금씩 변화를 만들어야 한다. 사회가 만들어 놓은 세상에 갖혀 사는 것이 아니라, 예술이 바라보는 가치를 널리 알려 결국 변화를 이끌어내는 것이야 말로 더 나은 환경을 만들기 위한 예술가의 본분이고 역할일 것이다.